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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인터뷰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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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PAP 댓글 0건 조회 1,114회 작성일 21-01-0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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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일시 및 장소 : 2020년 10월 6일 15:00 국립현대무용단 회의실
                      10월11일 15:00 메리어트호텔 커피숍


장광열: 3년 전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직을 그만 둔 후 오래 동안 춤 계 현장에서 홍승엽 감독을 볼 수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홍승엽: 원래 관심을 갖고 있던 아동무용에 대해 연구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몸으로 하는 예술놀이’가  그것이다. 발레나 한국무용의 경우 춤사위의 기본
틀이 있으나 창작적인 철학이 몸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곧 현대무용의 정신이다. 이를 어떻게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아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성장 시절 경험, 아이를 키울 때의 경험을 담았다.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재임 때 초등학교를 방문해 한
무용공연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온 연구 결과물이 ‘몸으로 예술놀이’이다. 국립현대무용단과 협력해 11월 한 달 동안 예술의전당 어린이 라운지에서
처음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 의외다. 안무가 홍승엽이 아동무용이라니----.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춤 단체인 댄스씨어터온(Dance Theater ON)을 만들어 국내외에서 활발한 창작 작업을 했고, 이후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독일 올덴부르크무용단 객원 안무 작업에 이어 곧바로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프로페셔널 안무가가 오래 동안 춤 현장에서 안무 작업과 담을 쌓고 r있었다는 것이---. 단절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구시립무용단을 그만둔 후 어떻게 되겠지?  뭔가 연결이 되겠지 생각했는데 춤계에서 연락이 없었다. 2년이 지나니까 생계가 걱정이 되었다. 뭔가 생기겠지? 한 게 꿈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내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곰곰 생각했다. 후배들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춤계에 빌붙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 싫었다.”

- 어린이들을 위한 무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예술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가와 함께 말하고 눈빛을 나누고----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시절 초등학교를 방문하는 기획 프로그램을 하면서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무용을 통한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작업에 대한 필요성을 다시 인식했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창작 작업이지만 1년, 2년 백수로 지내면서 이것이 내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60-70분짜리로 20개 정도의 수업 모델을 만들었는데 80프로 정도는 내가 만든 작품의 컨셉트를 변형시킨 것이다.”

- 10년 전 2020년 8월 국립현대무용단의 출범은 한국무용과 발레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던 직업 현대무용단의 출범이란 점에서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 무용단 체제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초대 예술감독에 누가 선임될 것인지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공모를 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선임이 되었나?“출범 수개월 전에 문화부 직원 한분과 만남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현대무용단의 운영방식에 대해 얘기가 있었고, 나는 ‘국ㆍ공립 현대무용단이 상주 단원체제로 운영되면 수년 내로 고여서 썩게 된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반드시 프로젝트 단체 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의견이 같았다. 그때 나눈 얘기가 지금의 국립현대무용단 시스템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는 알 수는 없다. 우리나라 춤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와 현대무용이란 창작 작업의 특성을 고려해서 한 말이었다. 현대무용의 강점은 소규모 인원으로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은 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무용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작으면서, 탄탄한 구조로, 전국을 대상으로, 나는 국립현대무용단을 그 중심의 컨트롤 타워로 만들고 싶었다.”

- 프로페셔널 무용단이 프로젝트무용단 체제로 운영되는 것은 일장일단이 있다. 이런 시스템을 제안한 사람 중에 홍감독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단원 오디션을 위한 예술감독으로서의 어떤 가이드 라인이 있었는가?    
“국립현대무용단은 우리나라 현대무용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필드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디션을 볼 기회도 똑같이 부여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안무가로서 나는 자신의 색깔을 갖고 있는 댄서들에게 가장 관심이 많다. 무대 위에서 어떤 짓거리를 할 수 있는 무용수, 안무 작업을 할 때는 그들의 고유성을 존중해주도록 노력한다.”

- 재임 기간 동안 단원들에게 어떤 점을 특히 강조했나?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이 되고 첫 작업을 위한 단원 선발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대무용계가 절벽에서 떨어져 풍비박산이 나기 전에 국립현대무용단이 생겨났다. 현실을 자각하고 열심히 하자’고---. 현대무용을 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 그 시대가 필요로 해야지 예술이 살아난다고,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재임 기간 동안 신작을 포함한 홍승엽 감독의 안무 작품과 국내 안무가(전미숙, 정의숙)와 해외 안무가(조엘 부비에) 초청 공연,  그리고 젊은 안무가들에게 창작 기회를 제공하는 ‘안무가베이스캠프’를 시행했다. 초대감독으로서 3년 재임 동안 아쉬웠던 점은 없었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제대로 못한 게 있었다. ‘안무가베이스캠프’가 그것이다.”

- 얼마 전 국립현대무용 창단 1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나는 역대 예술감독의 기억할 만한 기획 프로그램으로 홍승엽 감독은 ‘안무가베이스캠프’, 안애순 감독은 ‘춤이말하다’, 안성수 감독은 ‘스트라빈스키 음악을 토대로 한 세 명 안무가들의 작업’을 꼽았었다. 초대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춤웹진>과의 인터뷰에서  홍감독은 ‘젊은 안무가들이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안무에 집중하는 프로그램은 흔치 않은 것 같고, ‘안무가베이스캠프’는 초보적 학습 캠프가 아니라 역량을 갖춘 안무가들의 안무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고무하는 전진 기지로서 제안된 프로그램이다. 말하자면 명작의 고산준령으로 떠나는 베이스 캠프이다‘라며 상당한 애착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술감독이 본인이 원하는 기획 프로그램을 시행하지 못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일 년은 했지만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국립현대무용단 이사진들의 반대가 있었고, 예산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타협이 되었다가 또 뒤집어졌다.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립현대무용단은 규모가 큰 것보다 작은 것을 다양하게 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나라 춤계의 환경 속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의 위치를 생각하는 게 늘 고민거리였다. ‘안무가베이스캠프’는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한 게 아니다. 어떤 틀을 잡아주고 싶었다. 한국의 현대무용계를 위해 제대로 방향을 잡고 싶었다.“

- 재임 기간 동안 창작한 작품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것이 있을 텐데?
“나로서는 다 좋다. 마지막 작품인 <개와 그림자>는 내가 원하는 만큼 만들어졌다. 일본 작가의 <라 쇼몽-어쩔 수 없다면>은, 한국의 <벽오금학>, 중국의 <아Q>와 함께 한중일 3개국의 문학작품을 춤으로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었고 원하는 만큼 나왔다. <냅다, 호랑이 콧등을 걷어찼다>는 3분의 1 정도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만, 나머지는 괜찮다. <수상한 파라다이스>는 제일 허술했던 것이 의상이었지만 나머지는 그런 데로 괜찮았다.”

- 지난 10년 동안 해외 안무가를 초청해 만든 작품들이 국립현대무용단의 고정 레퍼토리로 정착되는 것을 보기가 힘들다. 이는 이 단체가 갖는 공공성의 측면이나 정체성과도 연계가 되는 것이다. 공공 무용단이 예술감독 개인의 무용단처럼 전락하는 모양새를 적지 않게 목격했던 상황에서 프로젝트 무용단 체제의 국립현대무용단이 결국은 예술감독 개인의 작업을 위한 전유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돌이켜 보았을 때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재임 3년은 무용가 홍승엽의 춤 인생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나?
“초대감독의 의미는 너무나 크고, 내게 큰 영광이다. 나로서는  '댄스씨어터 온'의 존재이유가 깨달아지는 시간이었다. 17년의 치열한 무용단 운영경험이 없었다면, 짧은 시간 안에 해야만 했던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셋업과 출항은 큰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쳐야 했을 것이다. 3년 동안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데, 저항에 부딪쳐 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 그 조차 받아들였던 것 또한 댄스씨어터 온의 현장경험을 통해서이다.”

- 초대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후 바로 댄스씨어터 온을 해체했다. 예술감독의 임기가 3년이니까 임기 종료 후 다시 작업할 기반이 필요 했을 텐데 의외였다. 함께 작업 해 온 단원들도 있는데, 당시 어떤 생각으로, 왜 오래된 단체를 해체한 것인가?
“17년 동안 끌어 온 단체를 해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댄스씨어터온을 창단한 것은 아카데미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술로 먹고 살려면 시장을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예술로 살아남기 위해, 프로페셔널 한 작업을 위해 만든 것이다. 단체를 창단하면서 단원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약속했다. 공연 후 개런티 지급, 5시 이전 연습 종료, 티켓을 강매하지 않으며 무용단 운영비는 내가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 약속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체 운영하는 정말 힘들었다. 15년째 되던 해에는 40대의 과로사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100평짜리 연습실을 운영하는데 매 달 임대료로 400만원이 나갔다.” 

- 국립무용단 초대 예술감독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 평가한다면?
“국립현대무용단을 그만 두고 2주 만에 객원 안무가로 독일의 올덴부르크무용단과 100일 정도 작업했다. 가서 느낀 것은‘내가 참 잘 했구나’ 였다. 그곳 무용단의 시스템이 내가 운영한 국립현대무용단의 시스템과 거의 같았다. 나는 경험으로 터득한 것을 토대로 하나씩 구축해 갔는데, 가서 보니까 그들과 거의 같았다. 내가 한 것이 옳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참으로 기뻤다. 재임 시절 동안 내가 못한 것은 많아도 잘못한 것은 없다.”

- 창단 후 10년이 지났다. 작금의 국립현대무용단의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재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후배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자기들도 모르겠다고 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얘기가 너무 안 들린다. 가슴 아프다. 이런 상황이 굳어지면 안 된다. 현대무용계는 현장에서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이 약하다. 우리나라 현대무용수들이 다양한 안무가들과 작업할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랐는데---. 현대무용계 전체를 보지 않고 국립현대무용단 하나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19 이후 매일 걱정하는 것이 현대무용 전공 무용수들이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 춤 현장에서 무용수들이 어떤 충만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창단하면서 제일 목표로 내세운 것이 “예술성 높은 창작 작품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가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국립현대무용단의 흔적을 되돌아보았을 때 이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역대 감독들이 시행한 프로그램 중 나름 데로 성과를 거둔 것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는 작품 제작이 먼저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의 공공성은 예술성 높은 작품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과의 만남은 그런 점에서 나눌 얘기가 많았으나 지면 관계상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쉽다.

정리 장광열(춤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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